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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론]Rousseau, Jean Jacques

myinfo1030 2025. 7. 13.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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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Jacques Rousseau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Genevan philosopher, writer, and composer (1712–1778) Jean-Jacques RousseauBorn(1712-06-28)28 June 1712Died2 July 1778(1778-07-02) (aged 66)PartnerThérèse Levasseur (1745–1778)EraAge of Enlightenment(early mo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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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혼내시려면 여기 좀”…女선생님에게 10살 남학생이 한 수상한 부탁 [사색(史色)]

[사색-99] “엉덩이를 처음 맞았을 때,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성적 취향은 불현듯 찾아오는 것임을. 분명 수치심과 고통을 느껴야 하는 대목인데, 외려 짜릿하고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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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혼내시려면 여기 좀”…女선생님에게 10살 남학생이 한 수상한 부탁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2025. 7. 12. 12:39

[사색-99] “엉덩이를 처음 맞았을 때,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성적 취향은 불현듯 찾아오는 것임을. 분명 수치심과 고통을 느껴야 하는 대목인데, 외려 짜릿하고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매를 든 서른살의 가정 교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열 살도 안 되는 제자가 맞을수록 희열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다. 한 번 더 때려달라고, 매를 놓지 말라고 사정하는 그를 보면서 여선생님은 매질을 멈췄다. 어린 학생의 표정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어린 소년은 그때의 피학적 경험을 평생 동경하며 살았다. 거만한 여주인의 발에 짓눌려 복종하고, 쳐달라고 애원하면서 쾌락의 끝을 보고 싶었다. ‘이색적 취향’을 고백할 자신은 없었기에 나이 많고 원숙한 여인들과 연애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낄 뿐이었다. 소년의 삶은 성적 일탈로 가득 찼다.

마조히즘을 느끼는 남성을 묘사 한 20세기 초 그림.
‘성적 방종은 인생 패망’이라는 도덕 명제는 그를 교묘히 비껴갔다. 그가 대철학자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마조히즘(피학성향)을 품고 있던 남자의 이름은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사상가. 민주주의 세계의 거대한 기둥을 세운 그였지만, 루소의 삶을 지탱한 건 성욕이라는 또 다른 벽돌이었다. “자유와 난봉은 연관돼 있다”(로버트 단턴)는 역설을 다시 한번 증명한 이가 루소였던 셈.
“때려야 달리는 말처럼, 내 생각도 맞았을 때 더욱 격렬히 달려나갔지.” 장 자크 루소의 초상화.
엄마의 부재 속에 자라난 루소
갓 태어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따뜻한 ‘엄마의 품’일 것이다. 루소에겐 없던 것이었다. 어머니 테오도라가 루소를 낳은 지 9일 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170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제작자인 아이작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 그는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를 향한 끝없는 그리움을 그리며 자랐다. 일에 채인 아이작은 아들 루소를 가정교사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서른살의 여인 라 르시에르가 그의 선생님이었다.
“아버지, 엄마의 품이란 건 무엇일까요.” 시계를 제작하는 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는 어린 루소.
그녀는 루소에게서 다소 이상한 취향을 발견한다. 어린아이가 맞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루소가 말년에 쓴 ‘고백록’에는 그가 체벌당했을 때 느낀 성적 쾌락에 대한 묘사가 적혀있다. “서른 살 젊은 여성에게 받은 벌이 내 남은 일생의 욕망과 열정을 좌우했다.”

열 여섯살이 되던 해 그는 가족과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 아이작은 재혼한 뒤 루소를 방임했다. 루소를 유명 조각가 문하생으로 보낸 이유였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루소는 견디지 못했다. 밥 주고, 재워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요량으로 그는 먼 길을 떠났다. 자유의지란 어쩌면 날 때부터 지닌 본능이었을지.

루소가 어린 시절 살던 스위스 몽살레브. 스위스 화가 페르디낭 호들러 작품.
운명의 여인을 만나다
대책 없이 떠난 길이었지만, 운명은 그를 한 여인에게로 이끌었다. 프랑스 사보이 지역에 거주하던 루이즈 드 바랑스 남작부인이었다. 30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가톨릭에 신실한 여인. 오갈 곳 없는 청년들을 가톨릭 전사로 양성하는 걸 소명으로 여기던 인물이었다.

성(聖)스러운 목적 이면엔 또 다른 성(性)적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남편과 별거하던 그녀는 젊은 사내를 들여 성욕을 풀었다. 잘생기고 어린 열여섯 살의 루소는 그녀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던 바랑스 부인은 어느새 루소의 침실로 들어왔다. 처음엔 당황한 루소도 어느새 그녀가 주는 쾌락에 빠지고 있었다. “어머니이자 연인”이라는 독특한 연애의 시작.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가.” 루소를 유혹하는 바랑스 부인을 묘사한 당대 삽화.
낮에는 철학, 역사, 언어, 문학 등 귀족이 배워야 할 모든 교양을 습득했고, 밤에는 쾌락의 시간을 가졌다. 원숙한 바랑스 부인은 침대에서 루소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루소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장면이었다. 바랑스 부인은 클로드 아네라는 또 다른 애인과 육체적 관계를 맺었는데, 루소는 이를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바랑스 부인이 사랑이라는 권력을 쥐고 뒤흔든 주체여서였다. 대표 저작인 ‘에밀’의 등장인물 ‘소피’의 모티브가 바랑스 부인이었다.
장 자크 루소가 바랑스 부인과 함께 살던 공간. [사진출처=Daniel CULSAN]
성적 쾌락과 함께 찾아온 지적 즐거움
바랑스 부인은 루소의 쾌락을 일깨워 준 인물이었다. 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지적 기쁨도 함께였다. 그는 바랑스 부인 밑에서 자신의 글쓰기 재능과 사고의 창의성을 깨달았다. 19세기 역사학자 쥘 미슐레는 “루소의 천재성은 바랑스 부인이 빚은 것”이라고 했다. 루소가 바랑스를 존경한만큼, 자주 실망했다. 그녀의 왕성한 성욕은 루소 하나로 채워지지 않아서였다. 루소가 27살 되던 해에 그녀를 떠난 배경이었다.
“루소, 자네는 자연을 왜 이렇게 추앙하나?”. 루소와 교류하면서 차이를 인지한 철학자 디드로. 그는 백과전서를 쓴 유명한 인사였다.
파리로 떠난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지적 성장을 경험한다.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만나면서였다. 디드로와 밤을 새어가며 벌인 토론으로 그는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해갔다. 인간의 이성이 중요하다는 데에서는 뜻을 같이했지만, 진보에 있어서만큼은 의견이 갈렸다.

루소가 보기에 파리는 발달한 문명을 지닌 곳이었지만, 그만큼 타락한 인간으로 그득한 곳이었다. 파리는 푸르른 자연이 가득한 고향 스위스와는 대비되는 곳이었다. ‘진보는 타락과 동의어’라는 그의 급진적 주장은 볼테르·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산업화라는 대변혁 앞에서 당당히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남자가 루소였던 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자연주의 사상에는 루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연은 이렇게 달콤하고 선한 것이랍니다.” 체리를 따는 장 자크 루소를 묘사한 그림.
스캔들의 중심에 서다
1757년 루소는 파리라는 문명에서 자신을 격리했다. 파리 북쪽에 있는 몽모라시 숲. 귀족 부인 데피네 부인이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해준 덕분이었다. 루소의 친구이자 계몽철학자였던 디드로,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생랑베르와 친교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다. 푸르른 나무로 가득한 이곳에서 그는 또 한 번 강렬한 사랑의 충동을 느꼈다. 소피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루소의 친구 생랑베르의 연인이기도 했다.

문명사회가 그어 놓은 금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걸 하나의 쾌락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루소는 생랑베르가 입대를 한 사이에 소피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소피도 루소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지금, 제가 빌려준 공간에서 다른 여자랑 뭐 하는 거죠?” 루소의 후원자 루이즈 데피네. 그녀가 마련해 준 공간에서 루소는 친구의 여인 소피에게 사랑을 느꼈다.
두 사람이 자주 숲 속으로 사라진다는 소문이 생랑베르에게 닿았다. 루소의 친한 친구였던 디드로도 더 이상 루소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루소는 “결코 육체관계는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세상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나무가 커튼을 친 둘만의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야릇한 침실이 된다는 걸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의 말을 비꼬아 듣기도 했다.

루소를 향한 비난이 일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평소 말했던 철학과는 다른 그의 삶의 오염된 행적이 비난의 화살이 되어 쏟아졌다. 루소는 파리 하층 계급 여성 테레즈 르바쇠르와 동거하면서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는데, 태어나는 족족 파리 고아원에 버렸다. ‘에밀’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애착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 철학자의 실체기도 했다.

볼테르와 에드먼드 버크는 “자기 아이들은 거리로 내다 버리면서 남에게 교육을 논한다”고 꾸짖기도 했다. 철학적 견해 차이로 시작된 논쟁이 인신공격으로 번진 것이다.

“철학자 남편님, 버릴 애들을 왜 자꾸 낳는 건가요.” 루소의 동거인 테레즈 르바쇠르 초상화.
인간적 호오가 만든 철학
계몽주의자를 일컫는 앙시클로페디스트(정확히는 백과전서파)와의 다툼으로 루소는 더욱더 깊이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해갔다.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저주하게 되는 법. 루소는 이성을 신처럼 받드는 계몽주의자들과는 다른 길로 나아갔다.

인간의 영혼,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 그의 정치 철학의 정점으로 통하는 ‘사회계약론’이 출간된 것도 디드로·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다툰 이후였다. 계몽주의자들은 루소의 작품을 헐뜯고 비꼬았지만, 루소는 그저 “음험한 음모자들”이라는 말로 넘겨버렸다. 지친 루소는 다시 고향 제네바로 돌아간다. 아직 문명이 모든 자연을 삼키지 못한 곳, 인간의 선한 본성에 아직 기름때가 묻지 않은 곳이었다.

“나에 대해 솔직한 것이 문학의 시작이겠지.” 중년인 루소의 초상화.
비난, 다툼, 치정. 그 모든 것에 지쳐있을 때 루소는 다시 지적인 여행을 떠났다. 자신의 내면으로였다. 어릴 적 선생님에게 맞았을 때 느꼈던 희열, 원숙한 여인에게서 느꼈던 육체적 쾌락, 친구들과 멀어지게 만들었던 소피와의 짧은 정신적 교감까지. 모두 한 책에 담았다. 고백론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오직 아름답게만 편집하려는 고상한 지식인들과 달랐다. 그 표현이 얼마나 강렬한지. 아직도 책장을 뚫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눕히고, 나는 그녀의 숨결과 함께 깊이 빠져들었다... 우리는 신음도 없이, 마치 한 존재가 된 것처럼 조용히 사랑했다.”(‘고백록’ 中)

루소의 고백록.
불멸의 정신을 남기고 눈 감은 루소
흉금을 열고 자신의 모든 걸 고백한 그는 ‘고백 문학’의 한 전기를 남기고 1782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육체는 사멸하지만, 정신은 불멸했다. 국가가 가진 모든 권력은 국민의 일반의지로부터 나온다는 루소의 생각은 혁명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인류는 이 사건을 통해 전제 왕정에서 국민주권과 공화주의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매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던 아이가 부른 나비효과였을지. 풍만한 중년 여성과 사랑을 나누던 청년의 자유로움에서 꽃피운 것이었을지. 민주주의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바퀴로 굴러가는 것이었을지.

“위대한 루소가 갔다.” 루소의 장례식을 다룬 삽화.
프랑스 혁명 우화에 그려진 루소.
<네줄요약>

ㅇ‘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론을 제공한 위대한 철학자 루소의 사생활은 바르고 점잖지 못했다.

ㅇ어린 시절 매질을 당할 때 느낀 성적 충동 이후 나이 많은 연상의 유부녀들과 문란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ㅇ성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로 연결된 덕분인지, 그는 계몽주의자들과는 다른 자연주의적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 갔다.

ㅇ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고백한 ‘고백론’으로 고백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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