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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제37대 대통령 James Earl Carter, Jr. 서거(향년 100세)

myinfo1030 2024. 12. 3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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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더 빛났던 지미 카터… 100년의 '발자취'

퇴임 후 더 위대해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향년 10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지난해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마 카터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로이터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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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영어: James Earl Carter, Jr., 1924년 10월 1일~2024년 12월 29일)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1977-81)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이다.[1][2] 민주당 소속으로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주 상원 의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주의 76대 주지사을 지냈다. 카터는 100세까지 산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다.

카터는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해군 잠수함에 승선했다. 카터는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의 땅콩 재배 사업을 되살렸다. 카터는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며 성장하던 민권 운동을 지지했고, 민주당 내에서 활동가가 되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주 상원 의원으로 재직하였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조지아 주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 후보였던 카터는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 의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상대로 신승했다.

카터는 취임 둘째 날 베트남 전쟁에서 병역을 기피한 모든 사람들을 사면했다. . 에너지부 교육부를 설립했으며, 에너지 절약, 가격 통제, 신기술을 포함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만들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동시에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파나마 운하 조약,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임기 말에는 이란 인질 사태, 에너지 위기, 스리마일 섬 사고, 니카라과 혁명,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위기가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카터는 데탕트 정책을 종식시키고 카터 독트린을 선포했으며, 소련에 곡물 금수조치를 부과하고,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에 대한 다국적 보이콧을 주도하여 냉전을 확대했다. 카터는 198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도전자 에드워드 M. 케네디를 물리쳤지만,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인 로널드 레이건에게 큰 차로 패배했다.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임명하지 못하고 임기를 마친 유일한 대통령이다.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인권 증진을 위해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비영리 주택 기구인 해비타트 운동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2002년에 관련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 협상을 중재하고, 선거를 감시하고, 전염병을 근절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을 여행했다. 정치적 회고록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썼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관한 두 권의 책을 포함하여 세계 문제에 대한 논평도 계속했다.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의 여론 조사에서는 대체로 카터 대통령을 평균 이하의 대통령으로 평가하지만, 학자와 대중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대통령 퇴임 후 기간에 대해서는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퇴임 후 더 빛났던 지미 카터… 100년의 '발자취'

최진원 기자2024. 12. 31. 10:19

 
퇴임 후 더 위대해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향년 10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지난해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마 카터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로이터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가 향년 100세의 나이로 지난 29일 오전 3시45분(이하 현지시각) 별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친 후 카터재단을 설립해 약 40년 동안 세계 평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가장 존경받는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 미국 조지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 후 해군 장교로 활동하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조지아주지사를 거쳤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대선 후보에 나서기 전까지 카터 전 대통령은 무명에 가까웠다. 이 시기 미국 최악의 정치 게이트인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 전쟁 등이 겹치자 미국 국민들은 기성 정치인과 다른 카터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는 1976년 대선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꺾고 미국의 3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재임 시절 카터 전 대통령은 크게 인기가 없었다. 1970년대 미국의 경제 불황과 높은 실업률 등이 겹치면서 재임 첫해를 제외하곤 내내 20%대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중재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을 이뤄내는 등 외교적으론 중동 평화에 기여했지만 결국 재선에는 실패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패 후 백악관을 떠났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한국과 마찰도 빚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주한 미군의 점진적 철수를 주장했다가 설전을 빚었고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퇴임 후 약 40년 동안 세계 평화를 위해 봉사해온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향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2009년 11월16일 태국 방콕 치앙미이주에서 집을 짓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로이터
 
카터 전 대통령이 가장 위대한 전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퇴임 후 더 많은 활동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조지아에 카터 센터를 설립 후 전 세계 분쟁 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취약국에 선거 감시 활동을 지원하고, 전염병 확산의 원인인 기니 벌래 퇴치 등에 매진했다. 또 빈곤층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비다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운동도 전개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 그는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하자 평양에 직접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 등과 만남 가지는 등 국제 평화에 상당수 개입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1978년 12월13일 워싱턴에서 열린 백악관 의회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로잘린 여사의 모습. /사진=로이터
 
카터 전 대통령과 아내 로잘린 여사와의 순애보도 화제가 됐다. 그는 1946년 로잘린 여사와 결혼 후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봉사했다. 로잘린 여사는 지난해 11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카터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등을 투병하다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난해 2월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오던 중 가족의 곁에서 별세했다.

최진원 기자 chjo063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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